햇빛 쏟아지던 날들
소설의 일 본문
- 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겨요. "사랑한다면 노력해야 된다"고 썼더니 사랑하면 희생하고 인내하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말하는 노력은 'try'에 가깝거든요. 가망이 없는데 한번 더 물어나보는 행위죠.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요.
(고등학교에서 이과 공부를 했고 천문학과를 지망하다가 영문과에 진학하셨습니다. 이과적 성향이 문장이나 세계관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다고 보세요?)
- 계획하는 점, 입력하는 만큼 출력된다고 믿는 점이요. 원하던 대로 천문학과를 갔다면 원래 꿈꾼대로 인생이 진행된 거니까 거기서 주류가 되려고 노력했을 것 같아요. 어쨌든 경쟁은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진로가 중간에 삐끗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장소로 오게 된 결과, 국외자의 태도 같은 게 생겼어요. 나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꿈꾼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아직도 있는 거죠. 사실 계획을 세워서 글쓴다는 것이 황당한 소리잖아요? 그런데 저는 다른 데서 왔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요. 저는 소설가는 타고난다는 말에 동의한 적이 없어요. 전 노력해서 소설가가 됐으니까요.
(역사는 거대한 내러티브고 소설은 역사가 잊어버린 이야기라고 하지만, 역사소설은 쓰다 보면 역사가와 비슷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진 않습니까? 역사학에도 미시사나 일상사라는 부분이 존재하잖아요.)
- 아무리 포스트모던한 역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이야기예요. 미시사는 인간의 삶을 미세한 차원까지 들여다보고 확대하니까 그 사람들이 중요해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구원해줄 수는 없어요. 소설은 불행하게 살다 죽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요. 그들의 삶을 확대해서 보여줌으로써 그가 태어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데에까지 가는 게 소설의 일이라고 봐요.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라고 해서 실패한 삶이라면, 대부분의 삶은 실패예요.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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