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쏟아지던 날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감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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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감각

alex420 2020. 3. 25. 22:44

여전히 일은 어렵고 많다. 너무 많다. 내가 하는 일이 재미있고 좋아하고 잘 하고 싶은데, 일이 너무 많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내가 게으르거나 멍청한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도움을 주는 동료들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혼자 견디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문득 부끄럽고, 내 목소리가 듣기 싫고, 내 행동 아니 내 존재 자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숨막힐 듯한 날들은 어쨌든 지나갔고,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적어도 숨 돌릴 여유는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많은 시간을 쓰게 되었지만, 그런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함께 있을 때 편안하게 농담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한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퇴근길엔 문득 피로감이 몰려와 5천원에 예매해 둔 영화 표를 결국 취소했지만, 버스에서 내려 집에 걸어오며 카페에 가서 책을 읽어야겠다 생각했다. 오랜만에 백팩에 책과 공책을 챙겨 동네 카페로 향했다. 그동안 평일 저녁에도 항상 사람이 가득하던 곳이었는데, 거의 마감시간 직전처럼 사람이 없었다. 새로 나온 메뉴를 주문했는데 나쁘지 않았고 포인트도 많이 적립해 주어 조금 기뻤다. 며칠 전부터 읽고 있던 책은 나무 책상 앞에 앉아 읽으니 더 재미있고 집중이 잘 되었다(믿고 보는 다혜리 선생님의 '출근길의 주문'). 재미있고,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다. 평소엔 늘 노트북을 올려놓고 공부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던 긴 테이블에 모처럼 혼자 앉아 있었는데, 근처에 단체손님들이 와서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폰에서 문득 들려온 노래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Little Dark Age). 단축영업을 하는지, 카페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문을 닫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카페에서 걸어 나오며 문득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고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는 리추얼이기도 했고, 그러고 나면 대개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보다도 오늘 읽은 책에서 얻은 에너지가 컸던 것 같다. 토스 만보기의 걸음수를 조금 더 채우기 위해 잠깐 동네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어느새 나무에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집 근처 펍 앞에서 자주 보이던 고양이를 또 만났다(가족일지도). 나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안다. 산책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 된다.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고, 다시 들여다 보면 된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꼭 1년만에, 이러다가 정말 죽어버릴 것처럼 힘들었던 한달을 보냈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괜찮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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