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쏟아지던 날들

공원이 있는 생활 본문

monologue/regular

공원이 있는 생활

alex420 2018. 9. 21. 23:04


공원이 있는 생활 

⠀⠀
오랫동안 근처에 공원이 있는 곳에 살고 싶었다. 여행을 가게 되면 어디든 도시의 크고 작은 공원에는 꼭 들르곤 했다. 오래된 유적이나 유명한 관광지만큼이나, 도심의 공원에서 보낸 여유로운 시간은 여행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되곤 한다. 사람들은 공원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강아지와 산책하고, 때로는 멍하니 누워 있고, 운동을 하고, 음식을 먹는다. 햇빛을 쬐고, 바람을 쐬고, 낮잠을 자고,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은 이런 사소한 일상을 보내는 여유를 동경한다. 공원이 거기에 있고, 그리고 거기서 보낼 시간이 있다는 것.
⠀⠀⠀
신림동에 살 때는 번잡한 역 주변이 정말 싫었지만 좋은 게 있다면 멀지 않은 곳에 꽤 크고 멋진 공원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희미해진 시절이지만 취업준비를 할 때도 자주 시간을 내 공원을 한두 시간씩 걷기도 했고, 우연히 친구를 만나 공원을 거닐다 아마추어 밴드의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비 오는 어느 날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회사의 면접을 보고 나서 공원 근처에 있는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기억은 소중한 일상의 풍경으로 남았다.

신림동을 떠나 5년가량 살았던 동네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근처에 공원이 없었다. 때때로 언젠가 들렀던 먼 나라의 공원을 떠올리며 내가 살고 싶은 삶은 그런 건데, 하며 아쉬워하곤 했다. 그러다 올해 초 어느 날 영화관을 가려다 문득 걷고 싶어져 길을 찾아보았는데 지도 위 초록색 네모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집에 누워 있다가 당장 슬리퍼 끌고 나갈 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지하철로는 한두 정거장, 걸어서도 30분이면 갈 만한 거리에 공원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는 아주 여러 번 지나갔던 길이었는데, 5년 동안 한 번도 들를 생각을 안 했던 거다.

날은 추웠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공원에 들렀다. 성벽처럼 둘러싼 나무를 지나 공원으로 올라선 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겨울 풍경은 조금 황량했지만 문득 몇 년 전 여름 리스본에서 들렀던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이 떠올랐다. 인천에 살던 시절 매일 퇴근길에 지나갔던 이름 모를 공원의 풍경도 생각났다. 내가 동경하던 일상은 이렇게 가까운 데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던 그때, 만약 새로운 길을 가지 못하고 이곳에 남는다 해도 여기 살아보면 좋을 것 같단 생각에 위안이 되었다.
⠀⠀
그리고 지금은 그 겨울에 보았던 공원 근처로 이사를 왔다. 오늘 아침엔 일부러 늦잠을 자며 신청해 놓은 시험도 보러 가지 않았고, 뒹굴거리며 영화를 보다, 드라마를 보다, 느지막이 끼니를 때우곤, 게으르게 집안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보냈다. 며칠 전부터 일요일엔 시험을 치고 공원에서 운동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에 가득한 근심거리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자꾸만 미루고 미룬 거다. 그러다 문득 화분을 사러 가야겠단 생각이 들어 꽃집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인데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었고, 그 낯선 풍경을 보니 문득 또 내가 동경하던 어느 여행지에서의 순간이 떠올랐다. 사실은 내가 원한다면, 조금은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고, 들뜬 마음으로 화분과 꽃을 사 들고 공원에 들렀다.

언덕에 오르니 수많은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니치의 풀밭에 누워, 햄스테드히스의 숲속에서, 케임브리지의 벤치에 앉아, 브리스톨의 언덕에서, 에든버러의 언덕에서, 골웨이의 바닷가를 달리며, 마치 내가 가지지 못할 풍경인 양 바라보고 절실하게 동경했던 생활의 모습이 내 눈앞에 있었다. 비록 나무 뒤로 보이는 건 산도 바다도 아니고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도 먼 곳을 그리워하고, 찾아다니겠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을 좀 더 반질반질하게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생활에는 앞으로도 싫은 것과 어려운 것, 이상한 것, 슬픈 것들이 가득하겠지만 그걸 뺀 나머지 순간들은 내가 원하는 것들로 채워나가고 싶다. 🌹

9/16 일

'monologue > regular'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리 쓰는 2018년의 ○○  (0) 2018.12.31
좋아하는 단어 모음집  (0) 2018.11.25
오늘의 작은 행복  (0) 2018.09.14
블로그 스킨 변경  (0) 2018.03.04
향수 이야기  (0) 2018.02.2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