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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쏟아지던 날들
엽서 위에 새겨진 예쁜 그림 같은그럴듯한 그 하루 속에 정말 행복이 있었는지 몸부림을 쳐봐도 이게 다일 지도 몰라아무도 찾지 않는 연극 그 속에서도 조연인 내 얘긴 그래도 조금은 나특별하고 싶은데 지금 그대와 같이 아름다운 사람 앞에선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낮은 몸에 갇혀 있대도 평범함에 짓눌린 일상이 사실은 나의 일생이라면 밝은 눈으로 바라볼게 어둠이 더 짙어질수록인정할 수 없는 모든 게사실은 세상의 이치라면 품어온 옛 꿈들은베개맡에 머릴 묻은 채잊혀지고 말겠지만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낮은 몸에 갇혀 있대도평범함에 짓눌린 일상이 사실은 나의 일생이라면 활짝 두 귀를 열어둘게 침묵이 더 깊어질수록대답할 수 없는 모든 게아직은 너의 비밀이라면 - 9와 숫자들, 높은 마음 (2013) / 9와 숫자들이라는..
이렇게 계절은 바뀌었지만아직도 난 잊을 수가 없는 걸그러던 어느 날 다짐한 거야여전히 용기없는 나를 도와줄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는 날조그만 테입을 내밀며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이런 내 맘을 너에게 고백하고 싶었어 정지해 버린 시간 침묵을 뒤로하고 눈이 수북히 쌓인 길 숨차도록한없이 달리네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는 날조그만 테입을 내밀며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이런 내맘을 너에게 고백하고 싶었어 정지해 버린 시간 침묵을 뒤로하고 눈이 수북히 쌓인 길 숨차도록한없이 달리네 - 재주소년, 눈 오던 날 (2003) /어제였나 눈이 녹아 미끄러운 길을 걷다가 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다.카세트테이프 끼워넣는 소리부터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래..신기하게도 이 노래만 들으면 영화라도 한 편 본..
불꽃놀이를 하는가 바람이 많이 불던 밤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무엇이든 묻고 싶은 밤. 뭐라도 묻지 않으면 누군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해올 것만 같은- 그날은 그런 바람이 불던 밤이었다. / 여름.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달빛. 그리고 두드러기 때문에 같이 놀게 된 무리가 있다. 모두 맨발이고, 모래를 밟을 때마다 전해오는 저릿함에 괜한 요의를 느낀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과장되게 웃고, 서로의 호감을 사려는 어이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청춘. 배고픈 듯 활짝 벌어진 동공들이 반딧불처럼 모래사장 위를 날아다닌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렇게 두근거리는 순간일수록 모두에게는 어떤 시치미를 뗄 만한 장난이 필요하다는 것을. / 아버지가 구부러진 숟가락을 들어 겸연쩍게 콩나물국을 뜬다. ..
- 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겨요. "사랑한다면 노력해야 된다"고 썼더니 사랑하면 희생하고 인내하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말하는 노력은 'try'에 가깝거든요. 가망이 없는데 한번 더 물어나보는 행위죠.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요. (고등학교에서 이과 공부를 했고 천문학과를 지망하다가 영문과에 진학하셨습니다. 이과적 성향이 문장이나 세계관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다고 보세요?) - 계획하는 점, 입력하는 만큼 출력된다고 믿는 점이요. 원하던 대로 천문학과를 갔다면 원래 꿈꾼대로 인생이 진행된 거니까 거기서 주류가 되려고 노력했을 것 같아요. 어쨌든 경쟁은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진로가 중간에 삐끗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
선우사(膳友辭) - 함주시초(咸州詩抄) 4 백석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혜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이 같이 있으면세상 같은 건 밖에 ..
··· 끝내고 무대에서 퇴장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할 것이다. 1년 전에도 샐리 헤이스와 함께 이걸 본 적이 있는데, 샐리는 무대 의상이나 장식이 참으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고 계속 말했다. 나는 예수가 이런 호화찬란한 의상 따위를 본다면 아마 구토를 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샐리는 나더러 신을 모독하는 무신론자라고 했다.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예수께서 진정 좋아할 사람은 그 오케스트라에서 작은 북을 치는 단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죽 보아왔는데, 부모와 함께 보러 갔을 때 나와 동생 앨리는 이 사람을 더 잘 보려고 자리를 옮기곤 했다. 그렇게 훌륭하게 북 치는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한 곡에서 북 치는 기회란 단 두 번 밖에..
··· '자기 세계'라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몇 명 나는 알고 있는 셈이다. '자기 세계'라면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서 마치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성곽에서 대기는 연초록빛에 함뿍 물들어 아른대고 그 사이로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을 불러일으켜 보는 것이지만 웬일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 세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가 그 성곽에서도 특히 지하실을 차지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 지하실에는 곰팡이와 거미줄이 쉴새없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모두 그들이 가진 귀한 재산처럼 생각된다. ···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한마디로 얼마나 기막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번득이는 철편(鐵..
··· 이모는 가끔 답장을 보냈다. 다정하지도 사려 깊지도 않은 편지였다. 이모의 글씨체는 작고 성의 없고 형체가 허물어져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쪽 뺨을 책상에 대고 엎드려 쓰는지 글씨는 흐릿흐릿하게 이어지다가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는 내 이야기로 편지를 채우지 못할 때는 섬에 관해 물었는데 편지를 읽는지 어쩌는지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너와 네 동생은 대체 몇 살이지, 편지는 대개 이렇게 시작했다. 너희는 언제 크지? 너무 길고 지루하네. 그리고 이모는 창밖의 사이프러스 잎이나 끓고 있는 홍차, 섬 곳곳에 쓰레기처럼 널려 있는 해조류에 대해 두서없이 얘기하다가 편지를 끝내고는 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는 건 예사였고 엄마에게 이렇게 전해, 하다가 끝난다거나 'ㅅ, ㅐ, ode'처럼 ..
··· 나는 시골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 쪽으로 걸었다. 어쩌면 이 계절의 하늘은 이토록 무연히 맑을까. 그리고 그 시절의 아픔은 어쩌면 이리도 생생할까. 아픔은 늙을 줄을 모른다. 아픔을 치유해 줄 무언가에 대한 기구가 그만큼 생생하고 질기기 때문일까. 이번 겨울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비어 있는 들판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 볼까. 며칠 전에 지구를 뜬 그녀의 별에 전파가 닿게끔 머리에는 긴 가지로 안테나도 꽂고······그러나 사람이 죽은 다음에 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 최윤, 「회색 눈사람」 中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끄만 정차장에서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푸라트 · 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털어트리고,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었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차장 가차운 언덕에서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