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쏟아지던 날들
쓸모없는 것. 본문
쓸모없는
학창시절 내 꿈은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땐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그게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깨닫고 그저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는 아, 이게 또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깨닫고 온세상에서 일개 법인으로 스케일을 줄여서 내가 지원하는 기업의 지속적 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신입사원 때만 해도 한 가지 목표를 물어볼 때 회사에 꼭 필요한, 대체될 수 없는 인재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회사생활을 하면 할수록 대체될 수 없는 인재 같은 건 없고 그냥 나는 적당히 짜여진 시스템 속의 부품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사실 그 시스템도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어디가 구멍이 나든 삐걱거리든 어떻게든 돌아가게 되어있다. 더이상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그리고 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아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결국 지금은 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냥 행복하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싶고 좀 말이 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다. 예를 들면 사무실에서는 쌍욕 좀 안 들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 같은 거. +그리고 비즈니스 매너 운운할 거면 개인적인 생리현상은 좀 프라이빗하게 해결하셨으면 하는 더 작은 바람. 그외에 크고 작은 바람들이 많이 있지만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으니 여기까지.
오늘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S가 자신의 직업을 추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생각나는 건 본인이 다니는 회사와 직무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던 선배였는데, 사실 그 선배가 나에게 그 얘기를 했을 때 그도 고작 1년차 사원이었을 뿐이고 직무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번 바뀐 것 같다. 그 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고, 그냥 최근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는 말, 그리고 어느 잡지에서 읽었던 '단언컨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건 최고의 행복'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공교롭게도 그 두 사람 다 번역가였다. (설마 동일인물은 아니겠지?) 그러면서 S 역시 작가라든지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본인의 직업에 대한 만족감이 높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물론 그건 그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보통 사람들에 비해 많고, 또 우리가 보는 건 대개 '성공한'사람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는 아마 자신의 일과 인생이 어느 정도 이어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일과 삶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서 생기는 고통도 크겠지만.. 어쨌든 나나 S나 보고서 한 장을 잘 쓰든 물건을 많이 팔든 사실 내 인생이 나아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으니. 하루하루 일하면서 분명 더 잘하게 되는 부분이 있고 배우는 점도 있겠지만 그래서, 그게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건 내가 지금 내 일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그런 걸거다 ㅋ) 그런데 예를 들어 소설을 쓴다면 모든 것이 글감이 되고 나의 생각 나의 하루 자체가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거고, 다른 사람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되거나,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거나, 행복을 느끼거나, 마 그러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일을 직업으로 삼기에는 재능도 용기도 없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결벽증처럼 회사와 내 생활을 더더욱 분리하게 되었다. 유치하지만 사무실 책상에 올려두었던 좋아하는 물건들도 집에 가져왔고, 어차피 잘 듣지 않지만 그래도 매달 신청했던 직무강의도 이제는 들을 생각이 잘 안 들고, 집에 와서 업무에 대해 생각하는 건 소름끼치도록 싫어서, 정말 1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모든게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는 나만의 노력이었지만, 가끔은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내 일이 싫고 부서가 싫다지만 그렇다고 회사에서 놀고 먹고 싶다는게 아니라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거다. 그래서 그 일을 잘하기 위해 자기계발도 하고, 혼자서 이리저리 아이디어도 내보고, 그렇게 하고 싶기도 한데 대체 뭘 해야될지 모르겠다. 오늘 A과장이 나를 쿡쿡 찌른 말이 있다. 너는 평생 보고서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꼭 이 부서 이 회사가 아니라 어딜 가더라도 그럴 거라고 왜냐면 너는 문과 출신이니까. 맞는 말인데 정말 듣기 싫은 얘기였다. 일단은 내가 A과장을 안 좋아해서 그렇고ㅋ 두번째로는 그 내가 안 좋아하는 사람이 내 미래에 대해 운운하는게 싫었고 세번째로는 어느 정도 맞는 말 같아서였다. 내게는 버겁게만 느껴지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항상 한 단계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게 힘들면서도 사실 나조차도 그 일을 하찮게 여기고 별다른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던 속내를 들킨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직원이라면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보고서를 잘 쓸 수 있을까 하고 서점에서 책도 찾아보고, 과장이 시킨대로 집에서 경제신문을 보며 요약도 해보고 하겠지만 나는 집에 와서 쓸모없는 짓만 하고 있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다. 뒹굴거리며 드라마도 보고 삼국지디펜스 게임도 하고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노래도 들었다. 그러면서 아 결국엔 인생의 원동력이란 덕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고,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내게 행복을 주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일에 대한 고민은, 월요일 8시부터 하겠다.
십 수번의 이사를 다니며 짐을 줄이고 줄여도 아직까지 내 방은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차 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차마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하기 어려운 잡동사니 상자에서 버릴 것들을 찾곤 하는데 그 중 심심치 않게 나오는게 고3 때 읽던 신문에서 오려둔 '귀여운' 일기예보 쪼가리였다. 지금이야 각종 드립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그때는 그 신문 두줄에서 느껴지는 재치와 여유가 좋아서 가위로 오려서 필통에 넣어놓곤 했었다. 어떤 일기예보는 지금 보면 별로 재미없기도 하고(예를 들어 '태양을 피하고 싶어~'같은) 이제는 별로 보관할 의미가 없어서 조금씩 버렸지만 그래도 그 종이 쪼가리들은 할만큼 했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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