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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필름카메라 수리하러 간 날

alex420 2017. 5. 25. 22:27

여행을 앞두고 거의 7년간 방치해둔 필름카메라를 다시 써보기로 했다.

오래된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갈 계획이라, 문득 필름사진 욕심이 났다.


휴학생 시절 당시로서는 나름 거금을 들여 야심차게 산 카메라인데, 언제부터인가 장농 속에 모셔놓고 지냈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그래도 벽걸이 장식이라도 했는데, 이사하고 나서는 어디에 둔지도 까먹고 있었다.

10여년 전 중고나라에서 카메라를 샀을 때도, 누군가의 장농에 처박혀 있다가 나온 것이었을텐데-

부디 완전히 망가지지만은 않았기를 바라며 다소 큰 돈이 들더라도 고쳐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몇 주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일이 특별히 바쁜 것도 아니었는데 하루하루 무슨 일인가 생기고, 

평일 저녁에 카메라를 고치러 가기에는 시간이 안 나서, 토요일 오전에 가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미리 전화해보니 내가 가려고 한 수리점은 토요일에도 똑같이 영업을 한다고 했다.

종로 세운스퀘어에 있는 곳이다.

토요일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아침 일찍 카메라를 고치러 갔다 와야 했는데,

문제는 나의 게으름이었다. 출근하는 날에도 제때 눈을 뜨기 힘든데 과연 토요일 아침에 자발적으로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금요일 저녁에도 좀 먼곳에서 친구를 만나고 온지라 너무 피곤해서 사실 잠들기 전까지 고민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떠보고 카메라를 고치러 갈지 말지 생각하자! 하며...

네이버 길찾기를 몇 번이나 돌려보며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마지노선은 몇 시다, 하며.


다행히 그 마지노선을 넘어가기 전에 일어났지만 꾸물거리다 원래 계획한 시간보다는 30분도 넘게 집을 나섰다.

아, 왠지 배도 고프고 힘도 없고 나와서 몇 발짝 걸었다고 벌써 땀은 나고, 망했다,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서울 가는 버스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고

갈아탈 시내버스도 착착 도착해서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종로4가에서 내려 세운스퀘어로 향하는데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이 시간에 종로라니, 하며!


내가 방문한 '제일카메라수리'는 세운스퀘어 별관에 있다.

별 생각 없이 지도만 보고 갔는데 건물을 보고서는 전에 시계 수리하러 와본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건물에 들어서니 여러 가게(라고 해야 하나) 사장님들이 부지런히 영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왠지 내 마음까지 정갈해졌다.

아래 사진은 본관이고 별관(테크노관)은 저 건물로 들어가서 쭉 직진하면 나온다.



수리점에 도착해서 사장님에게 조심스럽게 카메라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았는데,

안에 온통 곰팡이가 슬어서 청소하고 부속품을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참 좋아하던 카메라 케이스는 막 처박아놨더니 가죽이 여기저기 녹고 삭아서... 그냥 버리기로 했다.

가죽케이스는 중고로도 구하기 힘들텐데.. 대체할만한 케이스나 가방을 열심히 찾아보아야겠다.


수리하는데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가게에 앉아서 고치는 걸 구경해도 좋고 볼일 보고 와도 괜찮다고 했다.

어떻게 작업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왠지 뻘줌하기도 하고 괜히 방해가 될까봐 나와서 카페에 가기로 했다.

세운스퀘어 테크노관을 나오니 건너편에 역대 대통령 포스터가 붙어 있다. 

마침 내가 길건너 카페도 있고, 궁금해서 가까이 가보았는데 포스터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선거연수원 건물.



세운스퀘어 건너편에 있는 귀금속상가 1층 스타벅스에 갔다.

날은 흐렸지만 창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금요일에 산 책을 읽었다. 제목은 <나와의 연락>.

집에 다 읽지도 못한 새 책이 한 가득이라,

소장가치가 있는 책만 종이책으로 사고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건 전자책으로 산다는 나름의 규칙을 세웠는데..

약속장소에 너무 일찍 도착해버려서 시간이나 때우자 하고 서점에 들어갔다가

무심코 펼쳐보고는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목이며 디자인이며, 내용 구성이며 사진, 폰트까지, 첫눈에 반해버렸다.

보통의 휴일이라면 느긋하게 혹은 게으르게 침대에서 뒤척일 시간.

평일이라면 분주한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릴 시간에

서울의 오래된 상가 앞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이렇게 멋진 글과 그림, 사진이 함께라니!



한 시간 정도 지나 다시 세운스퀘어로 돌아갔다.

다른 방향에서 보니 선거연수원 건물 벽에 그림이 가득했다.



새 대통령이 뽑힌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때였는데, 언제 저렇게 정성스러운 그림을 그려놓았을까.

너무나 멋진 벽화였다!



건너편에서 본 세운스퀘어 별관(테크노관).

1층에 몇몇 카메라 수리점이 있다.



카메라는 무사히 고쳐진 것 같았다. 사장님이 카메라를 한번 확인해보라고 했는데,

사실 나 카메라 안 쓴지 너무나 오래되어서, 봐도 잘 모르겠더라. 좀 부끄러웠다.

수리비용은 6만원. 다행히도 내가 생각한 예산 안이었다.

카메라와 부품들이 가득한 수리점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괜찮다고 하셨다.

나도 저렇게 몰두할 수 있는 나의 일을 하고 싶다···



다른 가게에서 필름도 3개 샀다. 너무 오랜만에 써보는지라 종류별로 골랐다.

써보고 마음에 드는 필름에 정착해야지.

한 롤은 지난주에 필름스캔을 맡겼는데 아직까지 안 나왔다. 내일은 나와야 할텐데-

부디 사진이 무사히 찍혔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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